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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살 베테랑 미들블로커의 마지막 불꽃이 한국도로공사의 추운 겨울을 따듯하게 만들었다. 녹슬지 않은 실력으로 여전히 코트 위에서 본인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팀은 역대 최다 12연승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자신의 배구 인생에 5세트 14대 14를 맞이한 정대영. 경기를 마무리 짓는 연속 득점을 얻기 위해 코트 위에서 마지막 투혼을 불태운다.
“이번 시즌 우리 팀도
정말 잘했어요”
Q. 사실 도로공사의 성적이 다른 시즌이었다면 정규 1위를 노려볼 수도 있는 성적입니다.
감독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 분명히 잘하고 있는데 2등이니 아쉬운 느낌이 들 수 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정말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승수를 많이 쌓아도 2등이라 ‘잘하고 있는 건가?’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현대건설이랑 경기하고 많이 알아갔어요.
Q. 올 시즌 도로공사에서 현대건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 맞대결까지 풀세트 혈투를 보여주셨고요.
시즌 초반에는 상대가 정말 잘해서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했어요. 2라운드부터 연승을 시작하면서 저희가 한 번은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3라운드 때 현대건설을 잡으면서 자신감이 생겼죠. 4라운드 때는 아프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선수들이 있었고, 경기를 대등하게 했지만 아쉽게 졌어요. 또다시 현대건설을 셧아웃으로 잡은 이후에는 자신감이 생겼죠.
Q. 올 시즌에는 오랜 시간 숙적이었던 GS칼텍스를 상대로 12연패를 끊어냈습니다.
오랫동안 져서 부담감이 많았는데 올 시즌 1라운드 때도 셧아웃으로 졌잖아요. 2라운드 경기에선 이번에는 꼭 이겨보자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어요. 부담감도 정말 많았고, 지고 있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역전해서 이겨서 올 시즌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됐어요.
Q. 개인적으로도 기억에 남을 시즌일 것 같은 게, 서브 200개, 수비 5,000개를 성공하셨습니다. 심지어 수비 5,000개는 미들블로커로 첫 번째 기록입니다.
미들블로커에서 수비가 나오기 쉽지 않은 거잖아요. 제가 여러 포지션에서 배구를 오래 했기에 할 수 있었던 기록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상을 받으면 민망할 것 같았지만, 막상 받으니 열심히 해서 이런 상을 받았다고 느끼면서 뿌듯했죠.
Q. 도로공사를 정대영 선수를 비롯해 배유나, 임명옥 선수까지 베테랑의 구단이라고 부릅니다.
우선 중요한 경기가 있거나 경기 도중에 흔들리면 어린 선수들은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를 몰라요. 저희는 워낙 많은 경기를 하면서 경험이 쌓였으니까 선수들한테 어떻게 말을 해주고 이끌어가야 하는지를 알게 된 것 같아요. 경기 중간에도 상황 파악이나 베테랑 선수들이 주축으로 다독여줘요. 지금 보면 주전 선수 절반 이상이 30대라 다들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지 않을까요?(웃음)
리빙레전드의 소망
“마지막까지 완벽하고 싶어요”
Q. 2019-2020시즌 이효희 코치가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이후, 정대영 선수가 실업리그 때 자유계약으로 데뷔한 최후의 선수가 됐습니다.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요. 기사 제목으로 가끔 언급되는 걸 보면 ‘너무 오래 했구나’라는 생각도 들 때가 있어요. 그래도 코트에 있는 만큼은 선수에 대한 자존심을 지키다 보니 선수들한테 본받는 선수가 된 거 아닐까 싶습니다.
Q. 신인 선수들과 세대 차이를 느낄 때가 있으실까요.
그럼요. 선수들이랑 운동 외적으로 잘 마주치지 않지만, 이야기를 해보면 ‘아이들이구나’하고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부럽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도 운동할 때는 아직 체계가 남아있으니 세대 차이를 느끼는 건 없는데, 당찬 모습을 보면 요즘 선수들은 다르다고 느껴요.
Q. 프로 출범 초창기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가장 달라진 점을 꼽아줄 수 있을까요.
선수들 연봉도 많이 오르고 수명도 길어졌죠. 제가 어렸을 땐 25살이 되면 ‘노장’이라는 소리를 듣고 은퇴할 시기였어요. 지금은 25살이면 어린 선수들이죠. 선수들 생각 자체도 달라졌고, 프로의식도 점점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정말 운동하기 편해진 것 같아요.
Q. 프로 초창기 때 정대영은 어떤 선수였나요.
프로가 출범했을 때는 전 이미 25살이었어요. 그래도 그때는 배구를 멋모르고 했죠. 배구를 재밌어서 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해야 하는 의무감으로 했던 선수였어요.
Q. ‘럭키걸’이라는 별명 기억하실까요.
정말 오랜만에 듣네요. 그때는 제가 생각해도 운이 좋았어요. FA를 통해 더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팀을 옮길 수 있었고, 옮긴 팀에서 우승했어요. 생각했던 대로 인생이 잘 흘러갔던 것 같아요. 주위 분들이 ‘럭키걸’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 당시에는 ‘이게 당연한가?’라는 생각이 들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운이 좋았던 거죠.
Q. 이제는 ‘대영이모’, ‘엄마센터’라는 새로운 별명이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듣고 싶다는 별명도 있을까요.
사실 저는 은퇴할 날이 얼마 안 남았잖아요. 지금 팬분들이나 주위 분들이 좋은 이야기를 해주세요. 부담스러운 적도 있지만, 이 모습을 마지막까지 보여드리고 싶어요. 끝에는 ‘대영 언니는 마지막까지 잘했어’, ‘정대영 선수는 마지막까지 잘하고 은퇴했어’라는 이야기를 듣고 완벽하게 은퇴하고 싶어요. 어떤 별명보다는 ‘도로공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였다’고 듣고 싶네요.
Q. 과거에 2016 리우올림픽 이전에 진행한 인터뷰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선수가 있냐’ 라는 질문에 박정아 선수를 꼽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박정아 선수가 IBK기업은행에서 뛰었지만, 지금은 한솥밥을 먹고 있네요.
제가 그랬나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웃음). 정아는 강단도 있고, 고집도 있어요. 어리지만 책임감이 강해서 팀을 이끌어가려고 하는 선수죠. 지난 시즌이랑 시즌 초반에는 좋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힘들어했어요. 주공격수라 부담도 많이 느끼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겨내려고 해요.
어릴 때 정아는 상대 팀이었을 때 어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은 상대하기 어렵죠. 이제는 성숙해지고 배구에 대해서 눈을 많이 뜬 것 같아요.
Q. 김종민 감독님께서는 “이제 대영이는 코트에만 있는 거라도 고맙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감독님이 그런 말씀 해주셔서 감사하죠. 선수라면 할 수 있는 몫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욕심도 많아요. 이 팀에서 마이너스는 되지 말자고 생각하고 항상 뛰고 있어요. 마지막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니 팀 성적도 좋고, 개인 성적도 따라오는 것 같아요.
Q. 본인에게 도로공사는 어떤 구단일까요.
도로공사에 오지 않았으면 코트에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없었을 거에요. 제가 배구를 오래 할 수 있게 해준 감사한 구단이죠.
“보민이는 제가 코트에 있을 수 있는
원동력이에요”
Q. 딸 김보민양도 배구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직은 많이 미흡해요. ‘정말 배구를 할 수 있을까, 선수를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올해 겨울방학 때 스토브리그 연습 경기를 영상으로 봤어요. 그 당시 선수 생활을 한 지 두 달 밖에 안됐는데 경기에서 잘하더라고요. 이제는 보민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민이가 배구하는 데 자신 있어 해요. 아직은 부족하지만 나중에는 저보다 잘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팬분들이 ‘이러다 보민이랑 같이 뛰겠다’고 이야기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 정도까진 못하겠어요. 주위에서도 보민이 프로 올 때까지 있으라고 하세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은퇴하자마자 관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웃음). 현실적으로 그때까지는 무리죠.
Q. 엄마 정대영은 어떤 엄마인가요.
친구 같으면서도 선배 같은 엄마라고 생각해요. 친한 친구들이랑 이야기할 때 ‘보민이가 딸이지, 후배가 아니다’라고 자주 들어요. 친하게 지내지만 아니다 싶은 부분에 있어선 단호하게 말해요. 아무래도 보민이가 배구를 하고 있다 보니, 배구에 대해선 더 매정하게 이야기해요. 또 저랑 떨어져 있으니 배구 스타일에서 잔소리를 많이 해요.
Q. 지금까지 코트 위에 있을 수 있는 원동력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보민이죠. 아이를 낳고 복귀했을 당시, 2년 동안 성적도 안 나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 당시 ‘아이를 엄마에게 맡기면서까지 배구를 하는 이유가 뭐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돈 벌어서 아이한테 모든 걸 다 해주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죠. 제 욕심이 컸죠.
지금은 보민이가 제가 코트에 있는 걸 무척 좋아해요. 본인이 배구를 하면서 엄마가 도로공사 선수라고 자랑을 많이 하더라고요. 이게 아이의 행복이자 저의 행복이죠. 딸한테 보여줄 수 있는 건 코트에서 열심히 하고 오래 서 있는 거라 생각해요. 덕분에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 배구 경기는
5세트 14대 14까지 왔죠”
Q. 많은 분이 정대영 선수를 자기 관리가 철저한 선수라고 평가하십니다. 비결을 들을 수 있을까요.
웨이트랑 보강 운동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웨이트 할 때 다른 선수들보다는 항상 조금 더 무게를 들려고 해요. 올 시즌 원정으로 9박 10일을 보냈을 때는 못했는데, 확실히 경기 때 힘이 없고 컨디션이 떨어지더라고요. 체중 유지를 위해서도 노력해요. 체지방이 왔다갔다하면 힘들어서 적정선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Q. 지금까지 배구를 하면서 힘들었던 순간과 행복했던 순간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힘들었던 순간은 아이를 낳고 복귀했을 때죠. 한동안 팀이랑 개인 성적이 안 좋았어요. ‘왜 다시 와서 이렇게 힘들게 할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좋았던 건 2017-2018시즌에서 통합우승을 했을 때요. 선수라면 통합우승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꿈을 이뤄서 좋았죠.
Q. 프로에 있으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자면 언제일까요.
매 경기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올 시즌 2라운드 때 GS칼텍스를 이겼을 때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오랫동안 졌고, GS칼텍스랑 경기만 하면 압박감이랑 부담감도 많았어요. 이 경기에서 이겨서 모든 게 다 풀린 느낌이 들어 제일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아요.
Q, 사실 이제 배구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경기 한 경기가 소중할 것 같습니다.
맞아요. 항상 경기 들어가기 전에 “오늘도 내가 이 배구 코트에 있음에 감사하고,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생각하자”라고 생각해요. 모든 경기가 소중해요.
Q. 본인의 배구 인생을 경기에 비유했을 때, 풀세트 기준으로 어디까지 왔다고 생각하실까요.
5세트 14대 14까지 왔죠. 이번 시즌 끝나고 배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바로 끝날 수도 있잖아요. 듀스 상황이 맞는 것 같아요.
Q. 배구를 그만두시면 어떠실 것 같나요.
시원섭섭할 것 같아요. 남편이랑 은퇴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제가 마지막 경기를 끝난 이후에 눈물이 많이 날 것 같다고 했어요. 그러더니 남편이 “너 진짜 많이 울 것 같아”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운동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놓아버리면 공허함이 많이 와서 한동안 힘들어한다고 들었어요. 남편이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줄게. 오래 떨어져 살았으니, 셋이 재밌게 살자”라고 이야기해줬어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오랫동안 했으니 한 번에 끊어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한동안은 힘들지 않을까요.
Q. 은퇴 후에는 어떻게 지낼지 생각해 보셨나요.
제가 유소년에 관심이 많아요. 시간이 된다면 유소년에서 지도자를 해볼 생각이에요. 그리고 보민이를 많이 돌봐주지 못해서 제일 먼저 보민이랑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Q. 본인에게 배구는 어떤 존재일까요.
인생 일부분이죠. 지금도 계속하고 있지만, 인생의 절반 이상을 배구와 함께했죠. 배구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도 없죠.
Q. 어떤 선수로 남고 싶을까요.
꾸준했던 선수요. 마지막까지 꾸준하고, 필요했던 선수로 남고 싶어요.
Q.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팬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정말 좋은 말 많이 해주시고, 좋게 생각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배구를 하는 동안 좋은 에너지를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는 제게 맞춰주고 있어서 정말 고마워요. 보민이는 정대영 딸이 아닌, 배구선수 김보민으로 성장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글. 김하림 기자
사진. 더스파이크